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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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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 긍휼 본문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리셨고 부활을 통해서도 들리셨다. 이 말씀은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모든 사람도 함께 들렸다는 뜻이다. 온 인류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이끄셨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과 상처와 질병과 아픔과 혼돈과 고뇌와 외로움이 그분의 죽음 속에서 받아들려졌다는 뜻이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과연 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일진대 우리도 다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들렸다. 우리가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젊은이든, 노인이든, 미국인이든, 러시아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아일랜드인이든, 니카라과인이든, 죄수든, 자유인이든, 전쟁 중이든, 평화로운 상황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은 골고다의 사건을 통해 그분과 함께 들려 올라갔다. 현재의 세상 사람들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부터 우리 이후의 끝 모를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에 함께 들렸다.
온 인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하나님이 몸소 당하지 않으신 고난이란 없다. 외로움이든, 분노든, 고통이든, 배척이든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분노와 고통과 씨름은 다 하나님 안에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들려 올라갔다. 우리 모두를 부활하신 주님의 몸 안에 모으셨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희망이 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온 인류를 향한 그분의 긍휼을 실체로서 현현해 보이셨다.
‘컴패션’(compassion:긍휼)이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아는가? 라틴어로 함께 라는 뜻의 ‘꼬므’(com)와 고난당하다, 라는 뜻의 ‘파시오’(passio)에서 유래했다. ‘함께 고난 당하는 것’이 긍휼이다. 예수님이 알려 주셨듯이 하나님은 우리 모두와 함께 고난당하신다. 인간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몸소 겪지 않으신 고난은 없다. 당신의 고난이든 세상 누구의 고난이든 마찬가지다. 이 사실을 알 때 위로가 싹튼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고난을 친히 당하신다.
구약에서 긍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쿰’(rachuwm)인데 이 단어의 어원은 ‘자궁’을 뜻하는 ‘레켐’(rechem)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태아의 고난까지도 함께 겪으시는 어머니와 같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 표현도 사실은 그분이 ‘함께 아파하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과 폐부 깊숙한 곳으로까지 느끼셨다. 나인성의 과부와 곧 장례를 치를 그녀의 아들을 향해서도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눅 7:11-17). 어머니이자 과부인 이 처량한 여인의 고뇌와 고통을 어찌나 사무치게 절감하셨던지 그분은 죽은 아들을 다시 살려 주셨다. 그분의 긍휼은 생명의 활동이 되었다.
나인성의 사건이 아주 중요함은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가 아니다. 이 사건의 위대함은 그분의 여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깊이 느끼셨고, 그리하여 그것이 생명의 활동이 되었다는 데 있다. 주님이 여인의 고난에 연합하셨기에 거기서 생명이 나왔다. 아들이 다시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모든 인간의 고난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바로 십자가다. 이는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을 보도록 부름 받았다는 뜻이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볼 때면 우리는 그 사람이 역경을 어떻게 견뎌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이미 그 고통을 당하셨고 지금도 그 사람과 함게 당하고 계신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고난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전시장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 역사란 하나님의 처절하고도 광범위한 고난이 전개되는 과정이다. 단, 그분의 부활도 함께 전개된다. 모든 고난의 한복판에 끊임없이 돋아나는 희망의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길: 헨리 나우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