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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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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2년 5월 2일(월) 본문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장)
+ 말씀설명
본문은 예수님이 태어나게 된 계보를 열거하고 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윗 왕을 거쳐 바벨론 포로 시대의 조상들을 나열한다. 이 계보를 통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며, 다윗의 자손이며, 모든 세상의 연약한 자와 죄인을 위해 오신 참 구세주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족보에 보면 마리아를 제외하고 네 명의 여인이 나온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아의 아내(밧세바)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방인이었으며, 부정한 자였으며(물론 룻은 제외), 정상적인 결혼 관계가 아닌 사람들이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에게 기록한 책이다. 그때 당시에 여인들이 족보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들은 인구조사에 들지 않을 만큼 사람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였다. 이런 사람들을 예수님의 족보에 조상으로 기록한 것은, 예수님은 유대인만이 아닌 이방인의 구세주이며, 남자들만이 아닌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의 메시야이며, 의롭고 잘 난 사람만이 아닌 죄인들의 왕이며, 똑똑하고 힘 있는 자들만이 아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그리스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 묵상과 적용
족보 하나를 통해서도 예수님이 이 땅의 참 구세주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족보를 통해 예수님의 성품과 그의 구세주 되심의 위대함과 오묘함을 알 수 있다. 세상의 기존 생각과 전통을 초월하고, 모든 세상의 가치관과 문화를 깨고, 세상을 구원할 참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참 구세주이신 것을 믿고 인정하는가?
예수님만이 참 구세주이심을 인정한다면 그분께 더욱 의지하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이 있는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손으로서 연약한 자를 위한 삶을 잘 살고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참 구세주이신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만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2. 케냐: 농업용 태양광 발전 기술을 통해 케냐의 더 좋은 농업 환경조성 및 식량 문제가 개선되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마 1장)
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일꾼으로 창조된 인간(주일 신앙이 평일로 이어질 때. 톰 넬슨)
우리 인간은 본래 휴식을 취하고 노는 존재일 뿐 아니라 일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성경의 첫 목부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무위도식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무위도식하는 세상을 창조하시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가 일하는 것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일은 경제적 교환, 재정적 보상의 문제, 혹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는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인간의 창조성과 기여의 문제이다. 보수를 받든 받지 않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지금도 진행 중인 하나님의 창조활동과 공동선에 기여하는 행위다. 일은 인간됨의 필수적인 부분이고,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사랑하는 것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의 중요한 부분이다. “일을 하나의 소명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우리가 일하기 위해 산다는 것, 우리의 일은 우리의 인간됨의 핵심 요소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창조세계를 경작하고 지키는 등 중요한 청지기직을 수행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개발하고 돌보고 보호하는 사명을 그분에게서 위임받았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 15절에 나오는 경작과 창조행위로서의 일은 “경작하다”란 말의 어원인 히브리어 단어 ‘아보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단어는 많은 경우에는 일, 섬김, 혹은 솜씨, 어떤 경우에는 예배로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의 다양한 용법은 하나님의 원초적인 설계와 열망이 일과 예배가 매끈하게 이어지는 삶을 사는 것이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주일에 행하는 어떤 것으로, 그리고 일을 월요일에 행하는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은 하나님이 설계한 것도 그분의 뜻도 아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예배의 행위가 되도록 고안되었다는 사실이다.
옛날에 성 바울 성당을 짓는 세 명의 석공이 있었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소?” 하고 첫 번째 석공에게 한 방문객이 물었다. “나는 돌을 깍고 있소” 라고 대답했다. 두 번째 석공은 “나는 생계를 유지하고 있소”라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의 경우는?”라고 세 번째 석공에게 물었다. “나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위해 성당을 짓고 있소”라고 했다. 일에 대한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지를 말해준다.
일단 일에 대해 바람직한 생각을 품게 되면 우리의 일상적인 일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꼭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일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위인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게 받은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