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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 2024년 1월 26일(금)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
- 역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임은 차이가 있다. 그래도 오프라인으로 모이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이 있다. 오늘도 한해 계획을 계속 세우고 있다(세웠다). 계획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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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교육 연구원(IMER)
오늘의 말씀 2022년 5월 7일(토) 본문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마 3장)
+ 말씀설명
세례요한은 사역을 시작할 때,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세례를 주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난 것과 같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는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세례 요한의 선포의 첫 번째는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교만함이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이 해야 할 것은 회개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례요한의 첫 번째 메시지였다. 오늘날도 회개가 천국 시민이 되고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의 첫 번째 모습이 되어야 한다.
+ 묵상과 적용
나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 대해 회개하는가?
내가 지금 회개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는가?
+ 오늘의 기도
1. 머리에 지식만 가득한 종교인이 아니라 삶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
2. 기독교인들이 타 종교의 사람들에게도 기독교의 사랑과 환대를 통해 신앙과 삶을 보여줄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성경본문(마 3장)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4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5 이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6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 "날마다 솟는 샘물"의 QT지 본문의 순서를 따랐습니다.
+ 이 주일의 말씀: 제 34장 몸은 하나다. 고전 12:12-26절
서론(12-13절)
교회는 다양한 은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이루는 공동체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몸과 같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성도이기 때문이다. 이 성도는 옛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한 자다. 성도는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에 의해 한 몸이 된 교회를 이룬다. 세례를 받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또는 그의 몸 안에 내포되어 한 인간(인격체)이 된다. 세례 받은 사람들은 인종적, 사회적, 신분적, 또는 성적 구분 없이 그리스도 안에 내포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몸이며, 한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바울은 가족도 없고 건강하지도 않으며, 경제적 가치도 없는 고대의 그리스도인 종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사람을 향해 바울은 격려한다. “세상은 너를 무가치하다고 판단할지 모르나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한 몸이다. 확실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각 지체는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모두가 참여하고, 각자가 섬기며,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다.”
본론
1. 모든 지체가 한 몸에 다 필요하기에 차별이 없다(14-18절).
1) 모든 지체가 필요하다.
몸의 지체는 모두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대로 각 지체를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각 지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된 것이기에 누구도 필요 없는 지체(존재)는 없다. 누구도 필요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모든 지체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모두가 필요하게 지어졌고 교회의 필요 일원이 된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
2) 차별해서는 안 된다.
누구도 다른 지체를 향해 차별을 할 수 없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영적 엘리트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서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15절).
중동의 전통 문화에서는 발과 신발은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것으로 간주된다. 왼손 역시 불결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발보다는 덜 불결하다. 그에 반해 오른손은 존귀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출 3:5). 더러운 신을 신고 거룩한 땅을 밟아서는 안 된다. 고대 이스라엘은 에돔과 원수지간이었는데 “에돔에 내 신발을 던질 것”(시 60:8)이라는 시편 저자의 말은 에돔에 대한 심한 모욕이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겠다(막 1:7)고 함으로서 예수님과 비교해서 자신의 비천함을 강조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언급하면서 “내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라고 말씀하셨다(요 13:18). 거룩한 책은 지면에 닿아서는 안 된다. 신발 바닥은 집에서나 공적 장소에서나 타인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
인도의 불가촉천민은 종종 자기가 무가치하다고 느낀다. 그들은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지만 그렇게 느낀다. 2003년 바그다드에서 사담 후세인의 동상을 넘어뜨린 후에 많은 이라크인이 신발로 동상을 짓밟았다. 2011년 이집트인들은 당시 대통령이던 호시니 무바라크를 철저히 거부한다는 표시로 자기의 신을 높이 들어올렸다. 이집트 정교회의 교회에 들어갈 때에도 그리스도인은 문밖에서 신을 벗고 들어갔다. 아랍권 중동 지역에는 발과 신이라는 말이 욕이다. 이 말을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사과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비유를 ‘더러운 발’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발은 “나는 부족하고 무가치하다. 그러므로 나는 몸에 속해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귀는 눈에게 유사한 말을 한다. 귀는 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지체이지만 중동 문화에서는 눈만큼 귀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발과 귀가 자기에 관해 생각하는 결론은 적절하지 않다. 발과 귀가 자신에 대해 느끼는 무가치한 감정 때문에 몸에 속해 있지 않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그것들이 실제로 몸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지체도 차별할 수도 없고 차별해서도 안 된다. 모든 지체가 필요하며, 모든 지체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2. 모든 지체가 합하여 한 몸이 되었기에 서로 돌보고 협력해야 한다(19-26절)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다른 지체도 함께 고통을 당한다. 그러므로 고통당하는 지체를 위해 도와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지으셨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통 받는 자들을 위해 도와야 한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였다(롬 12:15).
만약 어떤 사람이 치통이 심하면 다른 모든 지체가 고통을 받는다. 치통으로 인해 잠을 잘 수도 없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고통당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 받는 자를 위해 도움을 주어야 한다. 반대로 한 지체가 높아지면 다른 지체도 높아진다. 한 지체가 즐거우면 다른 지체도 즐거워진다. 음악을 들을 때 귀가 즐거워하지만 온 몸이 즐거워한다.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것은 얼굴인데 마치 햇볕이 몸 전체를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서로가 돕고 협력해야 한다. 서로 싸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몸의 연약한 부분, 또는 노출 시킬 수 없는 부분을 더 보호하고 덮듯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도 연약한 자들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자랑과 멸시로 인한 분쟁 대신에 상호 돌봄으로 인해 건전한 기능을 해야 한다. 교회의 한 형제가 은사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다른 형제들이 그를 멸시할 것이 아니라 그의 부족으로 온 교회가 그만큼 가난해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 형제가 은사를 놀랍게 행사하면 다른 형제들은 그것을 질시할 것이 아니라 그의 부요함으로 온 교회가 부요해짐을 깨닫고 같이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들은 교회 전체의 공익을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오늘날 성도의 고통을 보면서도 고난에 함께 동참하지 않는다면 바른 교회가 아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들과 함께 살면서 동정심이 사라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교회와 성도는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